8주차 - 나희덕의 시 : 소리들과 움직임, 침묵의 의미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나희덕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친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 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멀고 귀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 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 나오며
단 한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 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해미읍성은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했던 장소입니다.
회화나무에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고 매달았다고 하죠.
느티나무는 그늘이 만들죠.
회화나무는 죽음을...
느티나무는 그늘이라는 어둠을...
우리에 상식을 벗어나는 말을 합니다.
제가 드릴 것은 어둠뿐이라고 말합니다.
항상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것보다,
타인의 어둠을 보고 자신이 더 나은 삶은 살고 있다는 위안을 주고 싶은
화자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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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수틀

나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천 위에 꽃, 파도, 구름을 그리는 장면을 오마주로 시를 지은 것 같아요.
바늘이 뚫고 지나간다는 것...
바로 고통의 경험이겠죠.
하지만 그 경험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편에서 저편으로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표현 이것은 바로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화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로 나를 완성해달라고 말하고 있어요.
자신에게 수놓았다 사라진 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시 인생에서 만남과 이별이
잘 보입니다.
인생을 하나의 작품이라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나봅니다.
헝겊위에 무엇이 수놓아질 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완성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성은 누구에게는 죽음일 수도 있고,
다른 성취일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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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小滿)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소만이라는 것이 절기상으로 음력 4월에 해당하는 곳이죠.
양력으로하면 5월 정도가 되겠네요.
봄이 절정을 피우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인은 초록이 세상을 채울만하다 싶은 때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여기서도 나희덕시인의 시 특징이 나타납니다.
절정의 끝, 거기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듯 받아들이고,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요.
자신의 시가 먼 훗날에도 읽혀지기를 소망하는 것이 보인다고 할까요?
시인이라는 소명이 있기 때문에 최고의 가치가 후세에도 읽히는 것이
시인이 바라는 최고의 삶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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