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차 - 이장욱의 시 1 : 구름의 형식 3



생각하는 사람

이장욱

어두운 골목을 지난 적 있다. 어떤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어쩌면 여행중이었던거야. 아니 맥주를 사러 가게로,

무참히 늙어가던 사내 하나가 무너져 있던 담 아래. 결국 동어반복일 뿐, 나는 약간 어긋나 있는 골목 끝을 바라본다. 나는 여행중이었던 거야. 아니 맥주를 사러 가게로.

언젠가 나는 이 골목을 떠올렸던 적이 있었지. 봄꽃의 어깨뼈 한쪽이 소리없이 내려앉는 밤에, 조금씩 비가 듣는 골목, 나는 거대한 돌을 들어 누운 사내를 향해 나는 여행중이었던 거야. 아니 맥주를 사러 가게로.

부디 정확하게 겨냥할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여행중, 아닌 맥주를 사러 어디론가. 이 골목에 하염없이 비는 내리고, 나는 중력을 나누어 가진 빗방울들을 연구라도 하는 듯이. 저기, 처음부터 행불이었던 세계. 아예 형체가 남지 않도록.

나는 물론 돌아설 수 있으라, 망명하는 바람을 쫒아. 어쩌면 여행중이었던 거야, 아니 맥주를 사러 가게로, 그런데 어두운 골목을 나는 떠날 수 없네, 나는 돌을 든 채, 어떤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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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이장욱

문득 스스로를 느낄 수 없는 하루가 온다. 세면, 식사, 여자의 전보. 이곳은 아름답군요 언제 서울로 돌아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그대의 소식을 두고 외출한다. 등뒤에서 나의 몫으로 주어진 시간은 폐쇄하는 문. 여기가 문 밖인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사물들. 아무렇게나 아름다운 것들, 가령 담배꽁초, 보도블럭, 초로의 여자가 나누어주는 <일수돈 씀니다>.

어쩌면 몇 편의 죽음만으로 한 시대를 설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종로2가의 가로수. 종로 1가의 바람 크로포트킨 공장이 무의미한 세계를 견디지 못해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광화문의 바람, 가로수, 다시 바람. 정신분석은 지겹다. 십수 년 전 바움테스트에서, 나는 고의로. 부러진 나무를 그렸다. 의사는 치유할 방도를 강구하자고 말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위약이었다.

그러므로 아직도 나와 친한 것들은 스스로를 묵인하여 죽어가는 것들이다. 가령 무언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열해 있는 간판들, 시월의 태양 아래 혼자 끓는 육체. 손차양 사이로 문득 햇살이 무심하다. 이순신 장 곁을 날아가는 지중해행 종이비행기, 생각난다. 이런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불긋한 색종이라도 접어 유장한 강물에 배 한 척 띄웠을는지, 그 배 지금쯤 멕시코만 어디서 좌초했을는지,

교보빌딩 화장실 변기 위에 달린 자동 감지기. 내가 다가가면 붉은 등을 켜는, 내 유일한 존재 증명, 그대가 서울에 없으니까 나는 죽도록 쓸쓸하다. 돌아오리다, 고 나는 전보를 치지 않는다. 거리에 도열한 간판들은 고의로 부러진 나무들처럼 고요하다. 또 위약이군, 중얼거릴 때 내 몸을 가볍가 통과하는 종이비행기, 아주 조금씩 스스로를 지워가는 사물들과 더불어, 다만 어느 날, 투명한 지중해의 햇빛 속을, 산보라도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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